후지와라노 사네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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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사네카타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자 시인으로,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증손이다. 그는 좌근위 소장, 우근위 중장 등을 역임하며 순조롭게 승진했지만, 995년 무쓰노카미로 좌천되었다. 좌천의 원인으로는 이치조 천황 앞에서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와의 말다툼으로 유키나리의 관을 던진 사건이 거론된다. 무쓰노카미로 재직 중이던 999년, 그는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의 시는 《수이 와카슈》를 비롯한 칙찬집에 수록되었고, 《오구라 백인일수》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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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사네카타 | |
---|---|
기본 정보 | |
![]() | |
시대 | 헤이안 시대 중기 |
사망 | 999년 1월 3일 (장덕 4년 12월 13일) |
관위 | 정사위하, 좌근위중장 |
주군 | 가잔 천황 → 이치조 천황 |
씨족 | 후지와라 북가 오노미야류 |
아버지 | 후지와라노 사다토키 |
어머니 |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
양아버지 | 후지와라노 스케토키 |
형제 | 후지와라노 사네카타, 사네미쓰, 스즈키 시게자네의 부인 |
자녀 | 아사모토, 고소기미, 겐진, 사다노부, 기겐, 스가와라노 사다요시의 부인, 유키스케(성은 알 수 없음)의 부인 |
묘소 | 미야기현나토리시 기타노의 주쇼 사네카타 아손의 무덤 |
추가 정보 |
2. 생애
후지와라노 사네카타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귀족이자 가인이다. 그는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증손자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숙부인 후지와라노 나리토키 밑에서 자랐다.[2]
젊은 시절 관직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초토쿠 원년(995년) 갑작스럽게 무쓰노카미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서 멀어졌다. 이는 사실상의 좌천으로 여겨진다. 이 좌천과 관련하여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와의 다툼으로 이치조 천황의 노여움을 샀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지만[7][8], 실제 좌천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9][10]
사네카타는 무츠국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하던 중,[1][2] 초토쿠 4년 12월(999년 1월)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1][2] 당시 나이는 40세 정도였다. 그는 송과의 무역 결제에 필요한 사금 조달 임무를 맡았으나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고, 이는 후임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13][14]
한편, 사네카타는 당대의 유명 여류 작가인 세이 쇼나곤의 연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며,[1] 여러 여성과 연애 시를 주고받는 등 풍류적인 면모도 지녔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2]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사네카타는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증손자였으며 "친위대 사령관"이었다.[1] 그는 삼촌인 후지와라노 나리토키 藤原済時일본어에게 양육되었다.[2]그는 세이 쇼나곤의 연인이었다고 전해지며,[1] 많은 여성들과 연애 시를 주고받았다.[2]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사다토키 | |
어머니 |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 [22] |
양아버지 | 후지와라노 나리토키 | 사네카타의 삼촌 |
자녀 (생모 불명) | 후지와라노 아사모토 | 장남 (?-1031) |
코소기미 | 차남 | |
켄진 | 삼남 | |
사다노부 | 사남 | |
기켄 | 오남 | |
이름 불명 | 장녀, 스가와라노 사다요시의 아내 | |
이름 불명 | 차녀, 교시(성 불명)의 아내[23] | |
이하 자녀는 각종 계도에 기재되어 있으나 사실 여부에 의문이 있음 | ||
자녀 (불확실) | 야스구 | [24][25] 어머니는 스즈키 시게토요의 딸[6] |
조카이 | [12][25] | |
지쓰미츠 | [26] 자손은 구키씨 | |
쇼쇼나이시 | [12][27] 어머니는 오오나카토미 스케치카의 딸, 시라카와 원 뇨보 |
2. 2. 관직 생활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증손자인 사네카타는 "친위대 사령관"이었다.[1] 아버지 후지와라노 사네토키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부이자 대납언인 藤原済時|후지와라노 나리토키일본어의 양자가 되었다.[2]좌근위장감을 거쳐, 덴로쿠 4년(973년) 종5위하에 서작되었고, 덴엔 3년(975년) 시종에 임명되었다. 이후 우효에 권좌, 좌근위 소장, 우근위 중장을 역임하며, 덴겐 5년(982년) 종5위상, 에이칸 원년(983년) 정5위하, 칸와 2년(986년) 종4위하로 순조롭게 승진했다. 쇼랴쿠 4년(993년)에는 종4위상에 올랐고, 이듬해 쇼랴쿠 5년(994년)에는 좌근위 중장에 임명되어 공경의 자리를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초토쿠 원년(995년) 정월, 갑자기 무쓰노카미로 좌천되었다. 같은 해 3월부터 6월 사이, 양아버지 나리토키를 비롯하여 관백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미치카네 형제, 좌대신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대납언 후지와라노 아사미츠, 대납언 후지와라노 미치요리 등 많은 고위 관료들이 역병 유행 등으로 잇따라 사망했지만, 사네카타는 양부 나리토키의 상이 끝난 9월에 무쓰국으로 떠났다. 임명을 받기 위한 주청 과정에서 정4위하에 서임되었다.

좌천 배경에 대해서는 이치조 천황 앞에서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와 와카에 대해 말다툼을 벌이다 격분한 사네카타가 유키나리의 관을 빼앗아 던져버린 사건 때문이라는 일화가 전해진다.[7] 이 일로 천황의 노여움을 사 "우타마쿠라나 보고 오라"는 명령과 함께 좌천되었다는 것이다.[8] 하지만 이 일화에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사네카타가 무쓰로 떠날 때 천황으로부터 막대한 전별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말다툼 상대였던 유키나리의 일기 『곤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좌천으로 보기 어렵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일화에서는 침착하게 대응한 유키나리가 천황의 마음에 들어 구로도노토에 발탁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유키나리의 임관은 같은 해 8월 29일로 사네카타의 임관과 8개월이나 차이가 나며, 미나모토노 토시카타의 추천으로 임관했다는 설도 있어[9] 일화와 사실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변방에서 객사한 사네카타에 대한 동정심으로 이러한 설화(죽어서 망령이 되었다거나 참새로 환생했다는 이야기 포함)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0]
『곤자쿠모노가타리슈』[11]에는 사네카타가 무쓰노카미로 재임하던 중 친주후쇼군 다이라노 고레모치와 후지와라노 모로토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12]
초토쿠 4년 12월(999년 1월), 사네카타는 임지에서 말을 타고 카사시마 도소신 앞을 지나가다가 말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말에 깔려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40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묘는 나토리시 아이시마에 있으며, 요코하마시 도츠카구에도 전 묘소(사네카타즈카)가 있다. 최종 관위는 무쓰노카미 정4위하였다.
당시 무쓰노카미에게는 송과의 무역 결제에 필요한 사금을 조달하여 중앙 정부에 바치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사금 부족 문제는 980년대부터 심각해졌는데, 사네카타는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급사했다. 이 때문에 후임자인 미나모토노 미쓰마사와 그 다음 후임자인 다치바나노 미치사다까지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었다. 결국 간코 5년(1008년)에 미쓰마사가 비단으로 사네카타가 미납한 분량을 보충해야 했다.[13] 한편, 무쓰로부터 사금을 받지 못하게 된 다자이후에서는 대금을 받지 못한 송나라 상인들과의 갈등 해결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중앙에 보내야 할 관물(또는 그것으로 조달한 유황이나 목재 등 송나라 측이 원했던 상품)로 대신 결제하게 되었다.[14]
사네카타는 세이 쇼나곤의 연인이었다고 전해지며,[1] 많은 여성들과 연애 시를 주고받았다.[2]
아래는 『중고가선36인전』에 따른 사네카타의 관직 이력이다.
연호 | 연도 | 날짜 | 관직/관위 등 |
---|---|---|---|
덴로쿠 | 972년 | 1월 24일 | 좌근위장감 |
덴로쿠 | 973년 | 1월 7일 | 종5위하 |
덴엔 | 975년 | 1월 26일 | 시종 |
덴겐 | 978년 | 2월 2일 | 우병위권좌 |
덴겐 (연호) | 982년 | 1월 7일 | 종5위상 |
덴겐 (연호) | 982년 | 1월 10일 | 5위의 구로도[20] |
덴겐 (연호) | 982년 | 1월 30일 | 겸 빈고개 |
에이칸 | 983년 | 11월 20일 | 정5위하 (우사 편로) |
에이칸 | 984년 | 2월 1일 | 좌근위소장 |
칸와 | 985년 | 1월 28일 | 겸 하리마권개 |
칸와 | 986년 | 7월 22일 | 종4위하 (소장로) |
칸와 | 987년 | 1월 20일 | 겸 단바권수[20] |
칸와 | 987년 | 7월 16일 | 우마두 |
쇼랴쿠 | 991년 | 9월 21일 | 우근위중장 |
쇼랴쿠 | 993년 | 1월 7일 | 종4위상 |
쇼랴쿠 | 994년 | 9월 8일 | 좌근위중장 |
쇼랴쿠/초토쿠 | 995년 | 1월 13일 | 겸 무쓰노카미 |
초토쿠 | 995년 | 9월 27일 | 정4위하[21] |
초토쿠 | 999년 | 12월 13일 | 사망 (무쓰노카미 정4위하) |
2. 3. 무쓰노카미 부임과 좌천
쇼랴쿠 4년(993년) 종4위상, 이듬해 쇼랴쿠 5년(994년)에는 좌근위 중장에 임명되어 공경의 자리를 눈앞에 두었지만, 초토쿠 원년(995년) 정월에 갑자기 무쓰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이는 사실상 좌천으로 여겨진다. 같은 해 3월부터 6월 사이, 양아버지 스미토키를 비롯해 관백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미치카네 형제, 좌대신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대납언 후지와라노 아사미츠, 대납언 후지와라노 미치요리 등 많은 고위 관료들이 역병 등으로 잇따라 사망하는 혼란이 있었지만, 사네카타는 양부 스미토키의 상(喪)이 끝난 9월에 무쓰국으로 떠났다. 임명을 받기 위한 요청 과정에서 정4위하에 서임되었다.이 좌천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치조 천황 앞에서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와 와카에 대해 말다툼을 벌이다가, 격분한 사네카타가 유키나리의 관을 빼앗아 던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7]. 이 일로 사네카타는 천황의 노여움을 사 "우타마쿠라(시가에 자주 등장하는 명소)나 보고 오너라"는 명령과 함께 좌천되었다는 것이다[8].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실제 좌천인지는 논란이 있다. 사네카타가 무쓰로 내려갈 때 천황으로부터 막대한 전별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다름 아닌 말다툼 상대였던 유키나리의 일기 『곤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좌천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또한, 일화에서는 침착하게 대응한 유키나리가 천황의 마음에 들어 구로도노토에 발탁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유키나리의 임관은 사네카타의 무쓰노카미 임명 8개월 뒤인 같은 해 8월 29일이었고, 그마저도 미나모토노 토시카타의 추천 때문이라는 설도 있어[9] 일화와 역사적 사실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후세 사람들이 변방에서 객사한 사네카타를 동정하여 이러한 설화(죽은 뒤 망령이 되었다거나 참새로 환생했다는 이야기 포함)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0].
사네카타가 무쓰노카미로 재임하던 중의 일로, 『곤자쿠모노가타리슈』[11]에는 친주후쇼군 다이라노 고레모치와 후지와라노 모로토 사이의 싸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12].
초토쿠 4년 12월(999년 1월), 사네카타는 임지에서 말을 타고 카사시마 도소신 앞을 지나가다가 타고 있던 말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말에 깔려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40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묘는 나토리시 아이시마에 있으며, 요코하마시 도츠카구에도 과거 묘소로 전해지는 사네카타즈카가 있다. 최종 관위는 무쓰노카미 정4위하였다.
당시 무쓰노카미에게 기대된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송나라와의 무역 결제에 필요한 사금을 조달하여 중앙 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사금 부족 문제는 980년대부터 심각해지고 있었는데, 사네카타는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급사했다. 이 때문에 후임자인 미나모토노 미쓰마사, 그리고 그 다음 후임자인 다치바나노 미치사다까지 책임 추궁을 받게 되었다. 결국 간코 5년(1008년)에 이르러서야 미쓰마사가 사네카타가 남긴 부족분을 비단으로 대신 납부하게 되었다[13]. 한편, 무쓰로부터 사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게 된 다자이후에서는 대금을 받지 못한 송나라 상인들과의 문제 해결에 고심했고, 결과적으로 중앙 정부에 보내기로 되어 있던 관물(또는 그것으로 조달한 유황이나 목재 등 송나라 상인들이 원했던 상품)로 대신 결제하게 되었다[14].
2. 4. 죽음
초토쿠 4년 12월(999년 1월), 무쓰노카미로 임지에 있던 사네카타는 말을 타고 카사시마 도소신 앞을 지나가다가 말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말에 깔려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나이는 40세 정도였으며, 최종 관위는 무쓰노카미 정4위하였다. 그의 묘는 미야기현 나토리시 아이시마에 있으며,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도츠카구에도 전 묘소로 알려진 사네카타즈카가 있다.당시 무쓰노카미에게는 송과의 무역 결제에 필요한 사금을 조달하여 중앙 조정에 바치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그러나 사네카타는 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급사하였고, 이로 인해 980년대부터 심각해지고 있던 사금 부족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의 미납분은 후임자인 미나모토노 미쓰마사, 다치바나노 미치사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간코 5년(1008년)에 미쓰마사가 비단으로 대신 납부하게 되었다[13]. 한편, 다자이후에서는 무쓰로부터 사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송나라 상인들에게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 보내려던 관물이나 유황, 목재 등으로 대신 결제해야 했다[14].
3. 인물과 평가
후지와라노 사네카타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뛰어난 가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는 『슈이와카슈』를 비롯한 여러 칙찬와카집에 총 64수가 실렸으며,[15] 고전 36가선 중 한 명으로 꼽힌다.[2] 특히 그의 작품 중 하나는 후지와라노 테이카가 선정한 『오구라 백인일수』에 51번째 시로 포함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풍류를 아는 재능 있는 인물로서 여러 설화가 전해지며, 후지와라노 킨토, 미나모토노 시게유키, 후지와라노 미치노부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또한 『마쿠라노소시』의 저자 세이 쇼나곤을 비롯한 여러 여성과의 교제 이야기가 남아 있어, 겐지 이야기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실제 모델 중 한 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 1. 문학적 재능과 교류
그의 시는 『수이와카슈』(7수)를 비롯한 칙찬와카집에 총 64수가 수록되었으며,[15][1][2] 고전 36가선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2]특히 다음 시는 후지와라노 테이카가 선정한 『오구라 백인일수』의 51번째 수록 작품으로 유명하다.
> かくとだに えやはいぶきの さしも草 さしもしらじな もゆる思ひを일본어
> (이 마음 이렇듯 타오르는 것을, 어찌 당신은 모르는가. 이부키 산 쑥뜸처럼 뜨거운데.)
> — 『고슈이와카슈』 연애1-612
이 시는 이부키 산(伊吹山)의 명물인 쑥뜸(さしも草, 사시모구사)에 빗대어 자신의 격렬한 연정을 표현한 것으로, 상대방이 알아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를 모은 개인 가집으로 『사네카타집』(実方集)이 전해진다.[1]
사네카타는 후지와라노 킨토, 미나모토노 시게유키, 후지와라노 미치노부 등 당대의 문인들과 깊이 교류했다. 풍류를 아는 재능 있는 인물로서 여러 설화가 남아 있으며, 특히 『마쿠라노소시』의 저자인 세이 쇼나곤과 교제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 외에도 20명이 넘는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며, 이러한 면모 때문에 겐지 이야기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실제 모델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3. 2. 백인일수
그의 시 67수가 『수이 와카슈』 이후의 칙찬 와카집에 수록되었으며,[1][2] 그는 고전 36가선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2]그의 다음 시는 후지와라노 테이카의 『오구라 백인일수』 51번으로 수록되었다.
이부키 산의 쑥 같이 불타는 이 마음을 모르리.
일본어 원문[3] | 로마자 표기[4] |
---|---|
かくとだに えやはいぶきの さしも草 さしも知らじな 燃ゆる思ひを | Kaku to dani e ya wa ibuki no sashimo-gusa sa shimo shiraji na moyuru omoi wo |
그의 시를 모은 사집인 『사네카타집』(実方集)이 전해진다.[1]
3. 3. 일화
후지와라노 킨토, 미나모토노 시게유키, 후지와라노 미치노부 등과 친하게 지냈다. 풍류를 아는 재능 있는 인물로서 여러 설화가 전해지며, 세이 쇼나곤과 교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20명이 넘는 여성과 교제했다고 전해지며, 겐지 이야기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모델 중 한 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슈이와카슈』(7수)를 비롯한 칙찬와카집에 그의 와카 64수가 실려 있다.[15] 개인 가집으로는 『사네카타 아손슈』(実方朝臣集)가 있다.
- 오구라 백인일수
- *51번 かくとだに えやはいぶきの さしも草 さしもしらじな もゆる思ひを (『고슈이와카슈』 연애1-612)
- 당시 5월의 단오에는 창포를 지붕에 얹는 풍습이 있었다. 사네카타가 무쓰노카미로 부임했을 때, 사람들이 단오인데도 창포를 얹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국부의 관원은 무쓰에는 그런 풍습이 없고 창포도 자라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자 사네카타는 아사카 연못[16]에 꽃창포가 있으니 그것을 얹도록 명했고, 이 때문에 무쓰에서는 단오에 줄을 얹게 되었다고 한다[17].
- 사후, 가모강 다리 밑에 사네카타의 망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18]. 또한, 쿠로도노토가 되지 못한 채 무쓰노카미로 죽은 것에 대한 원념으로 참새로 환생하여, 궁궐 내 식사 장소에 놓인 음식(다이반, 台盤)을 먹었다는 입내작(入内雀) 설화도 전해진다[19].
참조
[1]
서적
McMillan 2010
[2]
웹사이트
Fujiwara no Sanekata
https://kotobank.jp/[...]
Sanseidō
[3]
서적
Suzuki et al. 2009
[4]
서적
McMilla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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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cMilla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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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亀井家譜
東大史料編纂所蔵
[7]
문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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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事談
[9]
문서
大鏡
[10]
서적
今鏡 (下)
講談社学術文庫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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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昔物語集
[12]
문서
尊卑分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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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御堂関白記
1013-04-23 #寛弘5年3月27日
[14]
간행물
平安期の貿易決済をめぐる陸奥と大宰府
思文閣出版
2012
[15]
문서
勅撰作者部類
[16]
문서
安積沼
[17]
문서
今鏡
[18]
문서
枕草子
[19]
문서
今鏡
[20]
문서
小右記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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権記
[2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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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後拾遺和歌集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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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野別当系図
[25]
서적
熊野修験
吉川弘文館(日本歴史叢書)
1992
[26]
문서
華族類別譜
[27]
문서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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